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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들에게는 소중히 여기는 것이 하나쯤은 있기 마련입니다. 사람, 감정, 혹은 물건에 대해 오랜 시간 동안 추억을 쌓아오며 특별한 감정을 가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경험들이 누적되어 그것을 더욱 소중히 여기는 것이죠. 건물 또한 특별한 곳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특별한 경험을 한 장소는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기도 하고, 일반적인 경험일지라도 그것이 쌓이고 쌓여 추억의 장소를 만들기도 합니다. 자신이 살아 온 집이라면 그 특별함은 더욱 큰 의미를 지닙니다. 영화 <가가린>의 주인공 유리에게도 자신이 살아온 주택단지 가가린이 가장 소중한 곳이었습니다.

세계 최초로 우주에 다녀온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의 이름을 딴 주택단지 가가린. 10대 소년 유리는 가가린의 옥상에서 하늘을 보며 우주비행사를 꿈꾸어 왔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꿈을 키운 공간이었던 가가린 주택단지. 이 곳의 철거가 결정되고, 유리는 가가린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친구들과 함께 돌아다니며 건물의 전등이나 엘리베이터를 고치고, 주택단지가 철거 대상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애씁니다. 리에타르 감독은 “가가린 주택단지는 유리에게 단지 철 지난 유토피아가 아니라 그의 현재이자, 미래의 토양”이라며 “그곳을 떠나는 것은 가족과 상상 속 세계를 버리는 것이자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주인 유리 가가린과 가가린 주택단지, 그리고 소년 유리까지. 의미심장한 이 이름들처럼 영화는 연출을 통해 주택단지를 살리기 위한 한 소년의 고군분투를 우주를 탐험하는 우주비행사의 시선처럼 비춥니다. 버려진 집을 우주정거장처럼 꾸미는 유리의 상상은 영화의 연출을 덧입혀 건물은 마침내 비행선이자 우주로 탈바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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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터전을 넘어서 한 소년의 우상이자 우주로 변신한 주택단지. 더욱 자세한 이야기들은 더 나누고 싶어도 스포일러가 되기에 많은 내용을 적진 못했지만, 건축학과를 전공하고, 인생의 전부를 아파트에서 살아온 저에게 이 영화가 던지는 매세지는 마음 깊숙히 들어왔습니다.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가가린 주택단지는 실재로 존재했던 곳이고, 주민들 역시 촬영에 동참했다고 합니다. 우주비행사 가가린이 보스토크 1호를 타고 지구를 벗어난 1961년. 가가린 주택단지는 1년 후 지어져 370여 가구가 살아가며 삶의 터전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지나며 공장은 문을 닫고 파리 외곽에 ‘레드 벨트’를 이루고 살던 노동자들이 떠나며 건물은 빈곤한 사람들과 이민자의 터전이 되었습니다. 약화된 치안과 건물의 안전 문제 등 쇠락을 거듭한 끝에 결국 2019년, 가가린 주택단지는 세워진 지 57년 만에 철거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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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역사를 가진 아파트가 철거를 앞두고 영화의 배경으로 탄생하더니, 참 낭만적이지 않나요? 프랑스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프로젝트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이미 철거되고 재건축이 진행 중인 둔촌주공아파트에서 사람들이 그려 나간 이야기들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 같습니다.

재건축을 앞두고 이곳에서 자라온 주민들의 이야기와 아파트의 일상적인 풍경들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집의 시간들>과 그 아파트 안에서 살던 길고양이들의 이주 프로젝트를 그려낸 <고양이들의 아파트>까지. 집 안에서의 풍경부터 아파트 놀이터의 미끄럼틀, 건물보다 높이 자란 가로수까지 사람들과 함께 자라온 모든 것들이 기록되고 수집되며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냈습니다. 어떻게 보면 결국 일반적인 아파트 한 단지였지만 그 곳에 살아온 사람들이 모여 이렇게 다채로운 이야기들을 그려냈고, 이 사람들의 이야기는 아파트가 철거된 지금도 현재진행형입니다.